단 한 줄의 명제에 음淫했던 것입니다
최인훈의 『구운몽』 중에서●1)
한번 잘 생각해 보면 좋을 것 같아요. 민주가 한국의 ‘한’을 서양 철학의 틀 속에서 가치를 증명해 보려고 하는데, (중략) 서양 그것도 철학의 나라 불란서 작가가 한국에 와서 살아보고 있는 이유가 흥미로운 시사점을 줄 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
2024년 8월 9일 H
실로 이것이 서양 철학의 틀 속에서 한의 가치를 증명하려는 시도인지 잘 성찰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외래의 방법론과 재래의 소재가 섞이는 곳에서는 학문적 대전제가 대상의 지형을 이미 변형시키고 있지는 않은가를 면밀히 살펴야 할 것입니다. 허나 서구와 동양 문화 가운데 무엇이 우월한가를 따져 묻는 논의에는 이렇다 할 의미가 없거니와 그것이 그리 유익하지도 않은 것 같습니다. 서양 철학이나 근대적 틀이 더 잘 볼 수 있는 부분이 있는 것만큼이나 못 보는 영역이 있을 터인데, 동아시아 문화에서는 그것들과 어떻게 관계해 왔는지를 한이나 음(陰과 淫)을 통해 확인해 보고 싶은 것이 이번 연구에서 바라는 바입니다.
2024년 8월 10일 민주 올립니다.
내가 느끼기에는 서양 철학의 접근 방식은 존재, 의식, 무의식, 이데아, 순수이성, 실존 등과 같은 개념으로 마치 벚꽃이 너무 아름다워 벚꽃의 본질을 찾으려고 가지를 칼로 베었다는 이야기에서처럼 실험실에서 죽은 개구리를 해부하듯 삶을 찾으려 하는 것 같다면, 동양에서는 수행, 인간의 정, 고, 한, 깨달음, 명상 등을 통해 삶을 통합적으로 느껴보려 한 게 아닌가 싶어요. 한국에 와서 살고 있다는 불란서 작가도 개념의 칼들로 삶을 자르고 분해하기보다는 삶을 삶 속에서 살아보고 싶었던 게 아닌가 싶고, 부족한 삶의 체온을 채워 보려고 하는 것 같아요.
2024년 8월 10일 H
작년에 프로젝트를 하면서 스님들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때 앎은 말로 전해질 수 없고 수행을 통해 깨달을 뿐이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일 년 내내 그 말씀에 붙들려 수행에 관해 생각하면서 지냈습니다. 한동안은 앎이 언어로는 소통 불가하다는 사실이 어딘가 무기력해, 그 수행에 진리나 깨달음과 같은 무엇이 정말로 있는 것인지 반신반의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 한편으로 논리 언어와 분석이라는 좁은 방법론이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 그 옆에는 언제나 깨달음, 헤아림, 소통과 공명의 차원이 있어 왔으리라 하는 예감이 있었기에, 수행을 통해 삶과 세계가 접하는 차원이 그것이 아닐까,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고 또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일까 하는 물음을 품었습니다.
수행은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살아내는 것이어서 개념으로 전할 그 무엇이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의 생각을 조금 더 말씀드려도 된다면, 저는 요가를 하면서 스스로를 염려하는 사유를 내려놓고 스승의 말에 자신을 맡겨 따를 때, 그리고 타인에 온전히 집중하여 그와 연결됨으로써 확장된 그 무엇으로 변모할 때 작게나마 전혀 다른 자기 관계에 진입했던 것 같습니다. 이 두 경우에는 공통적으로 원자적 주체 안으로 집중해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관계를 통해 자아의 바깥으로 발산해 간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이것이 홍익弘益이 아닐까요? 나 아닌 남을 향해 마음을 둘 줄 아는 것 말입니다.
한은 원怨망하고 원菀통해하고 회悔한이 남아 탄嘆식하는 마음인 동시에 정情을 두고 원願하는 바를 품은 마음입니다. 오직 원한만 있다면 그 공격성이 타인을 향하여 복수 혹은 해코지에 이를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 한이 깃들 때 우리는 슬퍼하고 후회하고 대상을 곱씹어 다시 느끼며 그로부터 솟아오르는 힘을 내면에 잠그어 두고 분주히 활성화합니다. 이러한 과정을 천이두는 ‘삭임’이라 일러, 한국적 한이 제 고유한 가치를 생성하는 과정이라 이릅니다.●2) 김지하가 ‘흰 그늘’이라고 불러 그로부터 미학과 윤리학을 강구하는 것 역시 한이 이루는 내면적 과정과 밀접합니다. ●3)
한이 내면을 향하는 경향성을 일컫는다고 할 때 그것은 원자적 자아 속으로 자폐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한에는 자기 안에 들여놓은 남과 관계하려는 정한情과 원하는 마음願이 작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남을 사랑하거나 아니면 미워하는 명료한 이분二分 체계가 작동하지 않고, 사랑하면서도 미워하고 미워하면서도 사랑을 품는 자기모순적인 지경에 놓일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것이 한이 만들어지는 초기 조건이 아닌가 합니다. 한은 고통의 원인이 되는 대상을 단적으로 미워하는 방식으로 마음의 파고를 없애거나, 상대를 절멸시켜 정념에서 헤어나는 것과는 다른 길을 선택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관계 속에 머무르려는 태도, 관계 상실로부터 자신의 생존을 구하지 않으려는 정서를 저는 한으로부터 느낍니다. 이것이 전적으로 좋은 지침이라고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건강과 생존을 위해 이별을 단행해야 할 때가 무수히 많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관계와 자기 관계 문제에 관한 시대적이고 국지적인 규범들을 숙고하여 발명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한이라는 양상으로 분화한 이 내면성이 어떤 가치들을 내포하는지를 일별해 보는 데에는 여하한 의미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것이 우리 자신의 삶을 다각적으로 이해하게 하고, 또한 그러한 이해가 인간과 관계에 관한 서구 중심 담론의 위계 지형을 변화시킨다는 점에서 말입니다. 하나이지 않은 관계성 안에서 서로 다른 무게로 실천된 가치들을 헤아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한이 품은 깊어진 내면성, 표출하고 절개하여 처분하여 즉각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보전하고 성찰하고 삭여 변형되는 내면의 경제, 니체의 철학에서는 노예의 도덕에 가까울 이 영역이 저에게는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능력의 실마리처럼 보입니다.
영적인 차원의 종교성이나 국수적 민족주의가 여전히 어딘가 무섭고, 서양 철학의 분석하는 힘과 섬세한 언어는 여전히 저에게 중요한 도구입니다. 그러나 어느 것도 논외로 두고 싶지는 않습니다. 저에게 장자莊子가 그 뜻이 깊은 이유는 동학과 서학이 지향하는 세계를 모두 포함하는 세계를 논리 언어가 아닌 예술의 언어로 그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2024년 8월 12일 민주 올립니다.
거기에는 안도의 빛이 있었다
손창섭의 「잡초의 의지」 중에서●4)
한을 민주가 그렇게 느낀다면 미운 정 고운 정 할 때의 ‘미운 정’과도 일맥상통하는 것 같아서 정이라는 것과도 같이 입체적으로 살펴보면 어떨까 싶어요. 한 가지 부분에 천착하기보다는 정이나 홍익인간 등 거시적이고 긍정적인 측면도 살펴보면 좋을 것 같아요. 한이라는 슬픈 감정만이 아니라 다른 밝은 면이 같이 있다는 점을 고려해 보면 좋겠어요.
분석적인 서양 접근법이 물질을 쪼개고 또 쪼개 원자, 전자, 쿼크, 참, 리보좀, 힉스 등등을 찾아도 아직도 궁극의 파티클 이 무엇인지 모르고, 양자역학이라는 것도 물질의 본질은 관찰자와의 관계에 따라 달라진다는 결론에 도달하여 궁극의 파티클이 아니라 관계가 물질을 규정한다는 것이 가장 최첨단의 과학적 결론이 된 현 상황은 장자와 부처 이래 이 세상을 원자적 분해가 아니라 연기와 변화의 순환과정으로 보는 통합적 접근의 유용성을 증명해 주고 있어 시사점이 있는 것 같아요.
2024년 8월 13일 H
작년 웃음과 농담과 욕설에 관해 공부하면서 느낀 것은 우리 문화에서 줄기찬 힘으로 생산되는 재치 있고 천연하고 슬프기도 한 농담들은 유머와 패러디에 관한 서양 학문 논의로 시원하게 설명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무엇이 저 웃음을 다르게 만드는가 하는 물음에 저는 지금 한이라고 대답해 보는 과정을 지나고 있습니다. 어쩌면 한은 그 바탕에 홍익을 두고, 표면에 깊이를 가진 웃음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젊은 나이에 한과 같이 슬픈 것에 골몰하고 있는 것이 속이 상하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전적으로 수동적인 태도로 보이는 이 한을 강조하는 게 도대체 한국적인 가치를 세우는 데 도움이 될까 의구스러우실 것 또한 짐작이 갑니다. 한국적인 모든 것이 슬픈 것인가 하면 그것도 아닐 것입니다. 관계에서 생겨나는 애환이란 가장 보편적인 삶의 요소들 중 하나일 터이니, 한이 한국에만 있는 것은 분명 아닐 거예요. 그러나 애환에 직면해 취하는 태도는 역사와 문화에 따라, 주요한 가치 조합의 차이에 따라 다를 것입니다. 그 태도가 무엇인지를 단칼에 규명하기가 쉽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한국적인 것에 슬픔이 서려 있다는 말이 무엇인지 이 문화를 접한 사람들은 대개 짐작하지요. 또 기록 문학으로든 판소리나 각설이 품바와 같이 구전된 서사에서든 우리는 한 맺힌 사연과 그에 이모저모로 대처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접합니다. 삶의 연속성 속에서 우리는 한의 존재를 체험합니다.
우리가 예감하는 저 한에는 구구절절한 사연이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무속을 매개로 한국 문화와 삶에 깊이 들어와 있는 ‘귀신’을 생각해 보아도, 그건 외국에서처럼 악에서 발원하여 물리쳐야 할 그런 존재가 아닙니다. 한국 문화에서는 생전의 한에 원인을 둔 슬픈 우리네 사람들이 귀신의 원형을 이룹니다. 그래서 귀신 이야기는 대개 애도하는 일, 사연을 들어주는 일, 기억하는 일이 연관되고는 하지 않던가요. 일방적으로 퇴마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말입니다. 거기에는 소통과 관계와 감응이 있습니다. 매개는 ‘사연’이고요. 그러하다면 저 말 못 할 사연을 있게 하는 것, 이야기를 생산하는 것이 관계를 가능케 하는 직접적인 방법이 아닐까요?
문학이, 그리고 문학적 언어의 한계를 넘나드는 예술이 중한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예술은 법에 의한 정의 구현과 쌍을 이루며 서로가 놓치는 영역에서 저 사연들을 구제합니다. 이 두 길을 다리 삼아 귀신은, 퇴치되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원을 풀어 혼은 하늘로 백은 땅으로 돌아갑니다. 거기에는 상대를 깨끗하게 사라지게 하여 홀로 순결하게 서는 대신 함께 문제를 해결하여 상대가 제 가고 싶은 곳으로 가게 해주려는 마음이 깃들어 있습니다. 이러한 모양의 관계성이 순수한 주체를 찾으려는 저 근대적 열망이 외면해 온 맹점을 가시화한다고 생각합니다.
순환과 통합에 관해 말씀하시니 두 가지 단상이 떠오릅니다. 하나는 주체에서 출발하는 관계가 관계로부터 구성되는 주체와 이루는 순환입니다. 주체를 진리나 세계로부터 독립하여 그것들을 명징하게 구분해내는 인식자로 사유하면 저희가 지난 편지에서 언급하였던 수행의 차원이 자리를 잃습니다. 그러나 주체는 불변하는 자아나 인식을 통해 발견되는 것인 만큼이나 외부 세계가 가해오는 진실과의 관계 속에서 형성되고 변형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주체는 다시금 담론과 이야기를 통해 세계를 변형하고, 타자와 관계 맺음으로써 타자의 생성과 변형에 개입합니다. 푸코Michel Foucault가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시기에서 재추적하는 ‘자기 배려’라는 실천도 이와 비슷한 영역이리라 생각합니다.●5) 그렇다면 서구 고대 서양에서 이루어졌다는 자기 돌보기와 한에서 발견하는 자기 관계는 어떻게 같고 다른지, 나아가 고대 이후 등장한 기독교적 자기 포기는 한의 내면성과 어떻게 같고 어떻게 다른지 궁금합니다.
순환과 통합과 관련하여 떠오른 또 다른 단상은 한이 지닌 ‘무화’에 관한 것입니다. 신은경은 한이 쌓이고 쌓여 어느 순간 마치 응고되었던 것이 액화하듯 무화가 일어나면서 자아가 비워지고 감정이 평정되는 체험이 일어난다고 설명하고, 이를 무화無找라 부릅니다.●6) 흥으로 자의식이 소진되어 무아감에 이를 때에도 유사한 상태에 이르지만, 한을 통한 무화는 소진보다는 초월을 통합니다. 무당이 빙신憑神하였을 때와같이 말입니다. 이렇게 자기를 초극하였을 떄의 한은 외부 세계에 의해 유발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문제의 원인이 해결되어 일어나는 감정적 해소와는 다른 체험이 됩니다. 이 극과 극의 순환 고리, 그 안에 비워진 자아와 그로부터 생겨나는 빈 자리, 보전되는 외적 계기들과 침투하는 관계들의 순환이 한에서 얻는 비원자적 자기 관계의 주체의 모양을 이루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요컨대 한에 있어 ‘풀림’이란 어쩌면 함정입니다. 한국어에서 한은 맺히고 풀린다는 서술어와 조응합니다. 그러나 한이 풀림을 지향하고 풀림에서 완성된다고 보는 순간 카타르시스의 논리로, 기독교적인 고백과 정화의 시스템으로, 정신의학적인 치료의 장으로 즉시 흘러 들어갑니다. 한이 끝내 풀려야 하는 것이라면 한국적인 것은 한이 맺힌 불행한 주체를 필요로 하는 악순환에 빠집니다. 한국적 주체는 한스러운 삶에 머물러야 한다는 식의 가학적인 결론이 답이라고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한에는 이 한이라는 상태를 끝내기 위해서 문제를 해결하거나 해소하는 것과는 다른 무언가가 있음에 집중해 보려는 것입니다. 한 속에는 ‘문제'가 여전히 들어앉아 있습니다. 그때의 자기 관계가 관건입니다.
2024년 8월 13일 민주 올립니다.
삿도께 그런 제 소회를 아뢸라구 오니
「원혼이 된 아랑낭자」 중에서●7)
서양 철학에서는 권력, 억압, 처벌에 대한 저항, 투쟁을 통한 자유의 쟁취라는 정해진 프레임이 있는데, 그것이 근대 정신의 핵심으로 간주되고 물론 이러한 지적을 통해 민주주의와 자유가 확대된 것은 분명하지만, 권력과 자유를 억압에 대한 투쟁과 저항의 대립구조로만 볼 것이 아니라, 개인이 자발적 수양과 자기의 도덕성을 함양해야 한다는 점, 즉 동양에서 우리가 가장 기본으로 실천해 온 수신제가치국평천하 할 때의 수신, 개개인의 수신에 대한 고민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우리는 조선조 때부터 왕도 공부를 해야 하고 선비들과 백성들까지도 삼강오륜, 수신 등 수행을 통해 개인의 도덕성을 닦아야 한다는 기본 인식이 있었고, 이것이 더 높은 수준의 자유와 행복으로 나가는 방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민주 생각이 궁금해요.
2024년 8월 14일 H
자유와 능동성을 중시하는 서구 문화에서와 달리 동아시아적 자유는 다른 사람의 의지나 외물이 야기하는 원인과 대립하기보다는 그에 조화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것 같습니다. 이 서로 다른 자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능동적으로 행한다는 것의 의미와 가치를 검토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앞서, 한이 수동적이라고 할 때 그것은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바깥으로 ‘건강하게’ 표출하기보다는 (참으로 건강이란 현대가 의심치 않는 가치입니다.) 개인의 내면 안에 가두어 둔다는 의미를 갖는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래된 서양의 병 ‘히스테리’ 또한 피투사성을 특징으로 합니다. 무언가에 암시되기 쉽다는 뜻입니다. 이런 수동성은 히스테리와 성애적 대상이라는 두 가지 섹슈얼리티로 총체화되는 여성이 열등한 존재로 가치 매김 되는 근거로 작용하였습니다. 서양에서 말입니다. 수동성이 능동성보다 열등하다는 감각은 지극히 서구적인 것입니다. 아마도 서양 철학의 가장 근본적인 전제들 중 하나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하지만 실로 수동성이란 무능력이 아니라 또 하나의 능력이 아닐까요? 타자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타자를 전적으로 있게 하는 것, 타자와 자연이 가해오는 것을 감각하는 것, 말하자면 수동성을 극도로 가능하게 하려는 능동성이자 능동성의 구체적인 양상들을 걷어냄으로써 도달하는 수동성, 그것이 ‘건강하게’ 관계를 맺을 가장 근본적인 조건 중 하나가 아닐까요?
이런 이야기를 하려면 실로 한이 가진 수동적인 인상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정말 그러한지를 먼저 검토해 보아야 합니다. 여기, 침묵하고 감내하는 정적인 풍의 한이 한쪽에 있습니다. 이 한은 말하지 않고 품어 삭입니다. 수동의 이미지는 거기에서 나오는 것일 겁니다. 그런가 하면 그와는 대조적인, 하소연 풍의 한이 있습니다. 한은 제 억울한 사연을 지치지도 않고 끊임없이 말합니다. 귀신이 되어서도 말입니다. 여기에서 저는 끈질긴 시도를, 끈질긴 용기를 발견합니다. 거기에는 대화, 관계, 소통, 이해를 향한, 욕망과 올바름의 성취를 위한, 죽음을 넘어선 궁극의 행위성이 있습니다. 한은 수동성만이 아닙니다. 한은 수동함과 능동함 모두를 포함합니다. 그러니까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수동적이거나 능동적이라는 이분화된 체계가 주체의 속성과 가치를 결정한다는 구도는 서양 철학적인 견해에서만 유효하다는 점입니다. 한은 무언가를 감수하거나, 감수하기를 결정합니다. 그건 어떤 수동성을 능동하는 것입니다. 또는 가장 최소한의 능동성으로 수동하는 것입니다.
말하지 않음과 말하기를 포기하지 않음, 이 두 모순이 한에서 발견될 때 어떻게 한이라는 이름에 이치를 부여할 수 있을까요? 아랑●8)의 한은 풀렸습니다. 반면 환향년●9)의 한은 맺히기만 하였고, 풀렸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자기 이야기를 고하여 원수를 무참히 벌한 아랑과 그 억울함을 고할 말조차 없었던 환향년의 서로 다른 경험에서 한을 하나와 같이 느끼는 것일까요?
여기에 대답하려면 사연을 매개하는 언어의 문제로 돌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한은 제 염을 말합니다. 이때 한의 말은 자신이 원망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한은 고통의 원인을 무의식에 두는 히스테리와 구분됩니다. 한편, 한이 할 말을 잃었을 때 그것은 히스테리와 닮은 것이 됩니다. 그렇다면 환향년이 말을 잃은 까닭은 어디에서 올까요? 감당하기 힘든 사실을 의식하지 않으려다 보니 정말로 의식하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반대로, 그로부터 유발되는 감정은 의식하고 있으나 그러한 작용을 정당화하는 개념이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탓일 수도 있습니다. 그에 대한 단어와 논리와 가치 체계 없이 그것이 ‘있다’고 말할 방도가 있을까요? 저 거대한 정절의 논리를 뒤집을 대항 도덕이 없이 환향년은 제 억울함을 사유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모욕의 즐거움을 작동시키는 경제를 뒤집을 대항 가치 없이 환향년은 제 이름이 욕설이 된 경위를 비판할 언어를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한은 말 대신 소리를 남기는 것이 아닐까요? 아마도 그것은 괴성과 무성 사이를 오갈 것입니다. 침묵하는 한과 하소연하는 한 사이에서 그네의 사연을 어떻게 들을 것인가가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지형 속에서 발생하는 것입니다.
한은 대개 여성적인 것이라 일컬어집니다. 저는 반대로 원한과 복수를 부르는 한을 남성적 한이라 불러보고 싶습니다. 그것은 복수하고자 하였으나 이루지 못한 자의 원한, 패배자의 원한입니다. 한을 미천한 것으로 보아 부끄러워하는 마음은 이러한 전제를 품은 자로부터 비롯되지 아니한가 짐작합니다. 반면, 어떤 한은 복수를 염하지 않기에 복수를 이루지 않습니다. 그런 한은 타자와의 연결을 통해 한이 풀리기를 염하기에 타자와의 얽힘에서 풀려나지 않습니다. 한 속에는 ‘관계'가 여전히 들어앉아 있습니다. 그때의 자기 관계가 관건입니다. 한국적 특수성 속에서 이 한은 삭임을 통해 우리 자신과 주어진 것을 조화시킨다고 이야기해 볼 수 있을까요? 그리하여 그것은 말이 아니라 소리가 되고 병이 아니라 수리성 든 시김새가 된다고 이야기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2024년 8월 13일 민주 올립니다. ●
미주
1) “그러면서도 그는 만족하지 못하고, 단 한 줄의 명제에 음淫했던 것입니다.” (최인훈, 『광장/구운몽』, 1961, 1962, 문학과지성사, 2022, 299쪽)
2) 천이두, 『한의 구조 연구』 , 문학과지성사, 1993, 14쪽, 99-114쪽 참고.
3) 김지하 ,『흰 그늘의 미학을 찾아서』 , 실천문학, 2005, 6-9쪽, 310-317쪽 참고.
4) “정혜의 얼굴에 차츰 짙은 미소가 퍼지기 시작했다. 완전한 체념에서 오는 서글픈 미소. 거기에는 안도의 빛이 있었다. (...) 정혜는 허탈한 미소를 머금고 입술을 오무려 갓난애의 볼에다 ‘쭉' 소리가 나도록 입을 맞추는 것이다.” (손창섭, 「잡초의 의지」, 1958, 『손창섭 단편 전집 2』, 가람기획, 2005, 86-87쪽)
5)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푸코의 주체의 윤리학 논의는 이러한 자기와 분리된 인식(gnôthi seauton)에서 주체의 본질을 찾는 서구 근대의 상식이 반쪽짜리임을 지적하면서 자기 변형을 수반하는 수양(epimeleia heautou)이라는 더 폭넓은 차원이 있었음을 밝힌다.
6) 신은경,『풍류 동아시아 미학의 근원』, 보고사, 1999, 259-261쪽.
7) “저는 이 전에 그 여기 원으로 지시던 아무개의 딸인데 제 이름이 아랑이올시다. 그런데 그 어느 사령늠의 욕을 당하구선, 제 목숨꺼정 이칼루 찔러가주구 이 앞에 남천강에다 쳐 넣어가주구, 제가 그게 원혼이 돼서 아 오시는 아 등내마둥 아 삿도께 그런 제 소회를 아뢰 아뢸라구 오니 아, 그저 그, 그렇게 직성이 든든치 못하셔서 그런지 아 그렇게 다들 돌아가시구 이번엔 영감[영검. 신령스러운 감응–원주]하신 사또를 뵈야서 제 소원을 전부다 아뢰니깐 소원을 들어주십시오.” (「원혼이 된 아랑낭자」, 횡성군 청일면 설화 45, 1983. 7. 20., 구술자: 권영복(남, 79),『한국구비문학대계 2-6』,1983, 388-389쪽)
8) 아랑 설화는 억울한 일을 당하여 죽은 원귀가 고을 사또에 해원을 요청하는 원혼형 설화로, ‘장화홍련'과 ‘콩쥐팥쥐' 이야기 등에서 나타난다.
9) “환향녀는 병자호란 당시 청군에게 붙잡혀갔다 고향에 돌아왔으나 절개를 잃었다는 이유로 가부장에게서 내쳐진 여인들이다. (중략) 화냥년은 여자의 성이 더러워졌다는 관념에 빗대어진 모든 욕설을 대표한다.”(김민주, 「환향년의 장소」,『환향년』, 히스테리안, 2019, 163쪽); “가부장이 권력이 되는 경로와 조건을 비추는 시선, 그 질서를 거부하고 균열을 읽으려는 시도, 이 의지와 실천을 ‘환향년’으로 불러보기로 하자. 잊힌 사연(환향녀들)을 불러와 기억하려는 마음과 자연스럽게 업신여기는 일(화냥년)을 부자연으로 만들고 싶은 마음을 강력하게 만들기 위해, 비슷하면서도 다른 이름(환향년)으로 실체화해보는 것이다.” (위의 글, 1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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