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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바랑전血囊傳 탄생기 ○ 윤마리


어느 순간 내가 밟고 있는 땅의 느낌이 왠지 내가 밟고 있는 것만이 아닌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누군가와 같이 밟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땅 밑에서 내 발을 누가 밟고 있는 것인지, 뭐든 알 수 없지만 누가 밟고 간 발자국에서 은근하고 미지근한 온기가 느껴질 때면 꽤나 오싹하고 따뜻했다.


무엇인가 흘리고 간 핏자국은 더 그랬다.


아이가 코를 후비다 흘린 코피 자국이든, 화장실 바닥의 월경 자국이든, 응급실 바닥의 검붉은 핏자국, 도로 위의 사체 조각들과 엉겨 붙은 피의 자국, 주삿바늘에서 떨어지는 핏방울이 스며든 시트의 자국들.

이 자국들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아무리 닦아내도 그 형상이 보이는 것 같은 존재감을 띠었다.


침투하고,

끈적대고,

끈질기다.


내가 흘린 핏자국은 왠지 남의 것 같았고, 남이 흘린 핏자국은 왠지 나의 것 같았다.


피바랑전血囊傳은 이렇게 시작한다.

핏자국을 따라가는 이야기.

미상의 혈흔을 찾아가는 이야기.

그리고 되돌아온다.

내가 흘린 핏자국과 당신이 흘린 핏자국으로.


 

누군가 나에게 한恨이 어떤 심상인지 물어보았을  때, 나는 그것이 죽음에 가깝다 말했다. 폐쇄적 공간 안에 갈피를 잃은 에너지가 제자리에 떠돌다가 결국 제풀에 죽어 소멸하는 이미지. 억압과 지연, 삭임과 성숙, 망각과 우울 그리고 초자아와 죽음충동의 이미지. 그리고 정신증을 간신히 면한 상태.

몇 달간 지속된 히스테리안 리서치클럽원들과의 여정과, 엄마의 한마디로 나는 이것을 ‘지극한 생명충동’이라고 보기 시작했다.

 

“죽지 못해 사는 거지.”

 

그렇다. ‘죽지 못한다’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고자’하는 것이다. 인간은 그 지극한 (그리고 지독한) 생명충동으로 죽음을 연기한다. 우리에게 다다르는 죽음에 대한 위협과 유혹은 너무나 다양하고 무쌍하기에 개개인은 무한히 아름다우며 무한히 비틀려진 정신으로 살아간다. 인간으로 윤회한 벌이자 축복인 것이다. 


마음이 한恨의 상태로 향하는 필요조건은 벗어날 문이 없는, ‘탈출구-없음’이다. 탈출할 수 없는 닫힌 공간 안에서 존재는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가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을 변화시킨다. 살고 싶어 사는 것이 아닌, 죽지 못해 ‘살아버린다’. 

 

나는 여기서 ‘초연超然’의 이미지를 떠올렸다. 

 

1.  얼굴에 근심스러운 빛이 있다.1)

2.  의기意氣가 떨어져서 기운이 없다.

3.  정색을 하여 얼굴에 엄정嚴正한 빛이 있다.

4.  어떤 현실 속에서 벗어나 그 현실에 아랑곳하지 않고 의젓하다.

5.  보통 수준보다 훨씬 뛰어나다.

 

 

한恨에서 느껴지는 초연超然의 심상은 ‘퍼런 불’이다. 퍼런 불은 강력한 불꽃을 일으키지도, 모든 것을 재로 만들어버리지도 않는다. 불이 불을 태우는 것이다. 스스로를 태우고선 연기만이 남지만 그 연기마저 흩어진다. 나는 보편적 불에 대한 인상과 충돌하는 이 ‘초연超然’의 심상을 19세기 과학철학자 바슐라르(Gaston Bachelard, 1884-1962)로부터 힌트를 얻었다.

 

불은 극단적으로 살아 있는ultra-vivant 것이다. 불은 내밀하면서도 또한 보편적이다.2)


불은 지극하고 지독한 생명충동의 강력한 상징이다. 불은 우리 안에 내밀히 자리 잡고 있는 생명의 원천이다. 그러나 “불은 태어나고 성장하는 모든 것을 삼키며, 잔뜩 ‘먹고’ 배를 가득 채운 뒤 더 이상 먹을 것이 없어지면 결국에는 자기 자신마저도 삼킨다. 불은 열과 운동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먹을 음식과 숨 쉴 공기가 없으면 살 수가 없다.”3) 이렇게 인간과 생명체와 다를 바 없는 불은 주변의 연소시킬 것이 없을 때, 소멸해버리고 만다. 그러나 연소시킬 것이 나타나면, 또 살아난다.

 

불은 “내적이거나 외적이다. 외적인 불은 유기적이고 부패시키고 파괴적이지만, 내적인 불은 정액 같고 생명을 잉태하고 성숙하게 한다.4) 불이 불을 태우는 초연超然의 과정은 외적인 불과 내적인 불의 주객이 무시로 바뀌는 과정이다. 태우는 자, 태우는 것, 타버린 것이 모두 같다. 

 

남자들은 불을 갖지도 않았고 만드는 법도 몰랐지만, 여자들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남자들이 숲으로 사냥을 떠난 사이, 여자들은 불로 음식을 구워 자기들끼리만 먹었다. 식사를 막 끝냈을 때 여자들은 저 멀리서 남자들이 돌아오는 것을 보았다. 그녀들은 남자들이 불에 대해 아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남아있는 불씨를 서둘러 긁어모아 남자들이 보지 못하도록 그것을 자신들의 음부에 감추었다. 남자들이 도착하여 불이 어디 있느냐고 묻자, 여자들은 불은 없다고 대답했다.5)

 

불을 가졌고, 만드는 법도 알았던 이들이 남이 알지 못하게 불을 자신들의 음부에 감춘 이 이야기로부터 ‘피바랑’이 탄생했다. 이들의 불은 남들에게는 없지만, 이들의 음부(내부)에 있다. 내부에서 피어오르고 자기 전체를 삼킨다.


무언가를 태운다는 피바랑이 종종 나타난다는 소문이 돌아다니는 어느 마을은 깊은 산골에 있어 차갑고 건조하지만 불은 잘 붙지 않았다. 사람들은 불을 욕망하고 불을 가진 이를 질투한다. 그가 메고 있는 바랑에서는 피가 뚝뚝 흐른다. 갓 떼어낸 심장 혹은 갓 태어난 아이가 든 것처럼 말이다. 사람들은 이 바랑 안의 것이 불을 가져다준다고 믿었고, 이것을 빼앗아 제사를 지내면 마을에 불이 다시 돌아온다고 생각했기에 피바랑을 족칠 모략을 세운다.

 

그녀는 땅바닥에 앉아 다리를 넓게 벌린다. 그녀가 자기 배의 윗부분을 움켜쥐고서 세차게 흔들자 불덩어리 하나가 생식기 밖으로 나와 땅바닥 위로 굴렀다. 그것은 오늘날의 우리가 알고 있는 불이 아니었다. 그것은 사물을 태우거나 끓게 하는 불이 아니었다. 그런 속성들은 여자가 그것을 주는 순간 사라져버렸던 것이다. 하지만 아지제코Ajijeko는 그것을 고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모든 나무껍질, 모든 과일, 타는 듯이 매운 모든 붉은 후추들을 모아서, 그리고 그것과 그 여자의 불을 함께 섞어서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불을 만들었다.6)

 

사람들은 결국 피바랑을 들춰내지만 안에는 제물로 바치기에 마땅한 것은 온데간데없고, 나뭇가지와 모래, 마른 고추와 후춧가루들로 매캐한 연기만 만들어질 뿐이다. 초연超然의 불은 바로 이렇다. 낭자하는 피와 같은 불꽃도 없고, 즉각적으로 무언가를 태울 힘도 없다.

 

화주eau-de-vie, 그것은 불의 물eau de feu이다. 그것은 혀를 태우고, 조그만 불똥에도 불이 붙는 물이다. 그것은 초산처럼 용해시키거나 파괴시키기만 하는 게 아니다. 그것은 자신이 태우는 것과 함께 사라진다.7)

 

연기들은 곧이어 사람들의 눈물과 침과 함께 물안개와 같은 형상을 만든다. 이 연령烟鈴 구름이 그것에게 비를 내리기 시작한다. 초산 같은 비는 그것을 씻어 내리는 동시에 그것을 서서히 태운다. 불꽃도 재도 없는 초화超火8)인 것이다.

 

불이 자기 자신을 삼킬 때, ‘힘’이 자기 자신을 공격하기 시작할 때 존재는 바로 그런 망실의 순간에 총체總體화하는 것 같다.9)

 

불을 지녔다는 피바랑이 자신의 불로 태운 것은 사람들이 아니라 본인 자신이다. 이 초화超火의 끝에는 연기만이 남는다. 그러나 잊지 말라, 불이 삼킬 것이 없을 때 소멸하지만, 스스로를 삼켜버린 불은 어딘가에 살아있다. 잉여의 연기는 곧 흩어지고, 피바랑의 핏자국으로 되돌아온다. 

 

색깔이 눈에 거의 보이지 않는 어떤 진동에게 자리를 내주고 물러나는 것은 불꽃의 끝, 그 한계에서인 것 같다. 그때 불은 탈脫물질화되고 비非실재화된다. 정신이 되는 것이다.10)

 

불이 불을 태워 연기로 흩어지고 또다시 돌아오는 초화超火의 과정은, 지극하고 지독한 생명충동이 정신이 되는 일이다. 불이 불을 삼켜 불을 잃고 불을 준다. 이렇게 한恨은 초연超然한 얼굴로 나의 것인지 남의 것인지 모르게 나타난다. 피바랑은 어디에나 있다. 어디에나 오고 어디로나 간다. 적어도 우리가 누군가의 핏자국에서 오싹하고 동시에 따뜻함을 느끼는 그곳에만큼은 있다. 

 

이후 마을 어귀에서 누가 외치는 소리가 들린다.

 

피바랑이 온다네

피바랑이 온다네

피바랑이 온다네



 

미주

1) 우리말샘 (opendict.korean.go.kr) ‘초연하다’

2) 가스통 바슐라르, 김병욱 옮김,『불의 정신분석』, 이학사, 2022,  23쪽.

3) 위의 책, 118쪽.

4) 위의 책, 130쪽.

5) 위의 책, 72쪽. 6) 같은 쪽.

7)  위의 책, 147쪽.

8) 위의 책, 147쪽. “어차피 사라져야 하는 거라면, 더없이 활기찬 삶에도 언젠가는 죽음의 본능이 부과되는 거라면 흔적 없이 사라지고 통째로 죽자. 우리의 삶의 불을 불꽃도 재도 없는, 존재의 핵심에 무無를 가져다줄 초화超火로, 초인超人적인 초화로 파괴해버리자.” (위의 책, 139쪽)

9) 위의 책, 140쪽.

10) 위의 책, 17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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