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죽기 전에 시작되는 애도가 있다. 단 한 순간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채로 살아간 어떤 사람의 애도. 그에게 애도는 사랑하면서 시작된 것이므로. 사랑하는 이와 나 둘 중 하나가 먼저 멸할 것이라는 진실. 그러기에 그의 신체는 평생 지어진 애도의 집이다. 한층 한층 중첩된 몸을 가지고 눌러앉아 기다리는 퇴적물이다.
1
너는 눈을 뜬다. 암석을 뚫어 만든 울퉁불퉁한 동굴이다. 건조한 동굴의 색과 냄새와 등에 닿는 감촉은 너의 선택과 상관없이 받아들여진다. 분명 무언가를 잊었다는 감각과 비슷하다. 누운 채로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리자 좁은 입구로 쏟아지는 가느다란 흰빛이 보인다. 어둠에서 빛을 바라보기. 너는 몸을 일으켜 빛을 향해 동굴을 천천히 걸어 나간다.
2
동굴의 끝에는 널따란 대지가 펼쳐진다. 야트막한 경사의 내리막을 걷는다. 대지는 산 가운데 골짜기이며 양쪽 산을 벽으로 둔 통로처럼 느껴진다. 바람이 불자 정강이 길이의 풀이 파도처럼 넘실거린다. 풀 사이사이로 달빛을 머금은 푸른 비석이 솟아나 있다. 비석은 풀과 함께 자라난 것처럼 대지를 덮고 있다. 토도톡. 풀들이 비석과 맞닿는 소리가 리듬을 만든다. 비석이 그토록 많은 것이 의아하면서도 그것을 파도에 부서지는 거품으로 생각한다.
너는 대지의 끝에 도달한다. 대지의 끝에는 세 가지의 갈림길이 펼쳐져 있고 갈림길이 시작되는 곳에 패널로 만들어진 단층집이 있다. 삐걱거리는 철제문을 열자, 단출한 방이 나왔다. 방의 안쪽 벽은 검은색이고 나머지는 하얗다. 가운데 놓인 테이블 맞은편 의자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무명천으로 만들어진 흰색 가운을 둘렀고 모자를 깊이 푹 눌러썼다. 옷은 그의 몸에 어울리지 않게 크다.
“나는 Moore라고 해.”
Moore는 습지에 사는 사람을 뜻하지만, 너는 한글 무아를 떠올리고 이는 한자 무아無我와 겹친다. 너는 무아가 일시적이고 우연적인 결합체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든다.
“여기는 어디야?”
“그늘의 땅.”
무아가 설명한다. 이 땅에는 죽음을 거친 자들과 산 자들이 형태를 가지고 교차하며 존재한다. 누군가 죽으면 그는 비석 아래에 묻힌다. 그런 비석을 찾는 사람들이 있다. ‘애도하는 자’. 이들은 사랑하는 사람의 비석 그늘에 앉아 몸을 굽혀 운다. 그들은 이제 남은 날을 모두 애도하게 될 자이다. 오랜 시간 비석 앞에서 애도하는 자는 울음소리가 굵고 거칠어지며 몸은 점점 검어져 그림자가 되어버린다. 비석의 숫자에 비하면 애도하는 자는 훨씬 적다. 너는 마음에 오래 품었던 질문을 보낸다.
“불행이 닥칠 것을 생각하지 않고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있어. 하지만 그런 자는 이 땅에 오지 않아.”
“여기 온 사람들은 불행한 사람들인가.”
“슬픈 사람들이지.”
“너는? 너는 슬픈 사람이야?”
무아는 자신의 깊은 슬픔을 감추려는 듯 눈을 감는다. 무아가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는 개운한 얼굴이다.
“여기서 묵도록 해. 이곳의 규칙은 사람들에게서 멀리 떨어진 사막으로, 그리고 세상의 소음과 심지어 이곳의 소음도 없는 곳으로 물러나는 거야. 스스로 이방인이 되어야 해. 봉쇄는 곧 여행이기도 하니까.”
너는 그의 말을 받아들이고 하루를 묵기로 한다. 무아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무아는 내면에서 길어 올린 질문을 혀 위에 올려놓고는 망설이다가 입을 연다.
“나는 고민하고 있어. 어떤 종류의 인내가, 살아남음이, 억압 속에서 잔존한 인간의 실마리가 아무런 의미가 없다면, 유한한 존재가 남긴 무의미의 그을림이라면, 그 절망감을 어떻게 견딜 수 있지.”
무아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너는 세 가지 대답을 떠올린다.
① 계속 슬퍼하면 돼.
② 잊어버리면 돼.
③ 나도 모르겠어.
그리고 가능한 무수한 대답들.
너의 대답을 듣자, 무아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말한다.
“이제 네가 술래야.”
너는 의아한 얼굴로 무아를 바라봤다. 무아가 자리에서 일어나 집을 나갔고 문이 닫혔다. 너는 신발을 벗고 아래로 꺼져 있는 푹신한 침대에 몸을 뉘었고, 지쳤는지 금세 잠이 든다. 그리고 꿈을 꾼다. 우리는 어차피 여기서 이야기일 수밖에 없어서 꾸는 꿈이다.
2-1
① “계속 슬퍼하면 돼.”
‘계속’이란 말을 되풀이하여 생각한다. 계속은 언제까지일까. 잠시 애도를 멈추는 일도 허락되지 않는 것일까.
너의 꿈은 안산, 팽목항, 맹골수도에서 시작한다. 보리는 자물쇠를 풀고 페인트 가게의 셔터를 위로 올린다. 가게는 10평 남짓이다. 보리의 머리는 노란색이다. 노란색은 애도와 리본과 4월의 색이다. 보리는 슬픔을 기억하려 한다. 그리고 슬픔을 기억하는 사람일 것을 보여주고 싶어 한다. 탈색脫色. 노란색은 머리카락에 색을 더하는 게 아니라 빼야 한다. 그것이 보리의 고통과 비슷한 것인지 묻는다.
너는 보리의 생각을 조금 엿듣는다. 보리는 자신이 조금은 단순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날 전까지는. 그리고 자신의 분노와 슬픔을 정확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날 전까지는. 지금은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언어는 늘 불확실하고 실패한다. 그리고 어쩌면 정확히 말하지 못하는 사람이야말로 조금 더 온전하게 감각하는 사람이다. 너는 그 말에 동의한다.
그날 가게에는 한참 손님이 없었고, 저녁쯤에 젊은 커플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커플은 멀지 않은 곳에 전셋집을 구했고, 고동색인 나무 방문을 칠할 거라고 했다. 어떤 색을 사고 싶냐고 물으니 노란색이 좋겠다고 했다. 어떤 노란색? 시그노? 골든 옐로우? 둘은 동시에 미소를 지었다. 눈이 아프지 않은 색이요. 색이 빠진 노란색이요. 보리는 흰색과 노란색 주황색 페인트를 꺼낸다. 빈 페인트 통도 하나 꺼낸다. 한번 섞어봐요. 섞고 싶은 대로. 둘은 바닥에 쪼그려 앉아 골몰하며 깔때기를 대고 조금씩 색을 섞는다. 선명한 노란색을 먼저 쏟고 그 위에 흰색과 주황색을 조금씩 섞는다. 이 정도? 아님 이 정도면 되려나? 둘은 서로를 마주 보며 웃는다. 보리가 아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멋져요. 환한 노란색이야. 둘은 같이 만든 노란색 페인트 한 통의 값을 치르고는 밖으로 나갔다. 그들이 나가고 보리가 거울을 보며 자기 정수리를 손으로 만져본다.
보리는 가게 문을 닫고 잠시 외출한다는 종이를 붙인 후에 지민 헤어로 걸어간다. 지민 헤어 주인은 보리보다 여섯 살 위다. 둘은 카운터에서 실랑이한다. 결제부터 해. 안 돼. 그럼 나 다른 미용실 간다. 그것도 안 돼. 보리가 언제까지냐고 물으니 주인은 계속이라고 한다. 자기가 미용실 문을 닫거나 보리가 그만두거나. 보리는 한숨을 내쉬며 에코백에서 무언가를 꺼낸다. 락앤락 통에 음식이 담겨있다. 주로 토스트나 딸기 같은 것. 굳이 하지 않는 말은 자신의 아들이 좋아하던 음식이라는 것이다.
“사실 우리 애들은 돌아오지 않는다는 거 알아. 그거 몰라서 이러는 거 아니고.
그런데 나는 우리 아들한테 창피하지 않은 엄마로 살고 싶어.”
목에 가운을 두르고 머리에 탈색 약을 바른다. 주인의 손길은 빠르고 능숙하다. 이제 한 시간 뒤 다시 약을 씻어내면 된다. 그러나 완성은 찰나의 순간이며 그 순간부터 검은 머리카락이 자라기 시작한다. 검은 머리카락은 보리에게 분기점이 된다. 기억하고 있던 것을 다시 기억해야 할 때, 스스로가 가진 무정한 검은색을 지워야 할 때. 나라는 존재를 지우고 잃은 사람이 되어야 할 때. 스스로가 기호가 되는 일, 과거로 회귀하는 일,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일치시키는 일. 그러나 그 일치가 머리에서 색이 빠지는 그 찰나뿐이라는 것 때문에 보리는 늘 어긋나있다. 보리는 시시포스가 되기를 시도한다. 풍화되기를 거부한다. 그때가 오기 전까지 보리는 미용실 의자에 앉아 눈을 감는다. 보리의 뒤에서는 잔잔한 선풍기 소리와 주인이 손을 씻는 물소리가 들린다.
보리가 눈을 뜨자 그늘의 땅 위에 있다. 땅 위에는 비석들이 서 있다. 아주 단단해서 두 발을 디딜 수 있었고, 속은 따뜻해 보였다. 보리는 애도하는 자가 되어 누군가의 비석 앞에 엎드린다. 그림자가 된다. 검은 몸과 검은 머리가 된다.
2-2
② “잊어버리면 돼.”
너의 꿈은 제주도와 오사카에서 시작한다. 무진은 누워서 자분자분 말하고 있다. 자기 딸을 향해.
“행진을 하는데 경찰의 말이 와서 아이를 걷어찼다고 하더라고. 그 아이가 죽었다는 이야기만 들었어.”
딸은 카메라를 들고 있다. 그 마음의 일부엔 카메라를 든 딸을 도와줘야겠다는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무진은 자기 딸도 알고 있는 죽음들에 대해 말한다. 재미있고 노래를 곧잘 불러 마음이 편했던 남편, 클래식을 좋아했지만 북한에서 음악을 빼앗기고 조울증에 빠진 장남, 둘은 세상을 떠났다. 기억은 더 과거로 간다. 무진이 오사카에 오기 전 살았던 제주 애월. 사람이 얼마나 죽었는지 작은 냇가가 시뻘겋게 물들었고, 들판에서 머리만 살짝이라도 움직일라치면 빵빵 총알이 날아들던 곳. 어른이건 아이건 학교로 끌고 나와 총을 쏘던 군인들. 눈앞에서 자식들이 죽는 걸 보고 울분에 차 달려들었다가 개머리판에 맞아 돌아가신 외삼촌. 사건에 연루되었다가 죽어버린 약혼자. 사람들이 죽어가고 시체가 쌓여가는 길을 뒤로 하고 무진은 살기 위해 30km를 걸어 일본으로 가는 배에 탔다. 갓난아기를 업고 남매가 산책을 나온 척 손을 붙잡고 길을 걸었단다.
그 이야기가 카메라에 기록되어 있으므로 무진의 기억은 오래 살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생명을 가지고 있던 무진의 머릿속에서는 그 이야기를 잊기 시작했다. 기억은 외부에 남게 되었다. 어느 것 하나 완전한 기억은 아닐 테지만. 망각이 삶을 지탱해 준다는 이야기는 편리한 이야기다. 너는 의문이 든다. 왜 알츠하이머 치매는 현재의 기억부터 지워나갈까. 과거의 기억들은 그대로 남은 채로 말이다. 그렇다면 결국 사라지지 않는 기억도 존재할까.
딸은 어머니의 말을 부정하지 말라는 의사의 말을 신뢰했다. 아버지는? 아, 아버지요. 딸은 어떤 대답이 좋을까 생각한다. 밖에 나가신 것 같아요. 장남은? 위에 있는 것 같은데. 이제 내려오지 않을까요. 죽은 자들을 늘 소환하면서 어머니는 죽은 자들과 함께 살아간다. 너는 누구니. 나, 나는 딸. 너희 어머니는 누구니. 어머니는 여기 있는데. 나의 어머니는 여기 앉아 있는 당신인데. 아니야. 아니라고요?
먼바다, 제주의 것이면서도 일본의 것이기도 한 바다를 보게 되어도 무진은 앞을 지그시 응시할 뿐이다. 그의 눈이 무엇을 기억하는지 무엇을 잊고 있는지 너는 알 수 없다. 휠체어에 탄 채로 손에 쥔 종이를 쥐락펴락할 뿐. 기억나요? 기억나요? 불에 탄 집과 그때 나눴던, 보았던, 살았던, 어떤 이름들이 기억나요? 어머니가 이 길을 걸어갔던 것이 기억나요? 무진은 잊기를 선택하지 않았음에도, 너는 묻고 싶어진다. 무진은 어떤 기억과 시간을 기억하고 싶지 않은 걸까. 그건 정말 선택으로 가능한 것일까. 잊으려는 건 잊힐까. 잊지 않으려는 건 잊지 않게 될까. 애초에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일까.
“어머니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어요. 대단한 미인에다 똑 부러지는 여자였다고.”
딸의 말을 들으며, 검은 돌과 파란 파도 앞에서 무진은 눈을 감는다. 기도하기 위해. 매일 읊는 기도, 가족들의 안녕을 비는 기도를 올린다.
무진이 눈을 떴을 때 그는 비석 사이를 걷고 있었다. 수없이 펼쳐진 비석들의 이름이 하나하나 눈에 들어온다. 알지 알다마다. 비석이 저마다 말을 걸고 무진은 그에 답한다. 잊은 사람에게는 새로운 기억이 생겨난다. 무진은 애도하는 자가 되지 않는다. 물큰한 땅을 여행하며 비석에서 들어야 할 이야기가 남아있다. 모든 이야기를 듣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2-3
③ “나도 모르겠어.”
너의 꿈은 아타카마 사막에서 시작한다. 군인은 자신이 사살 명령을 내렸고, 몇몇 현장에 참여했음을 인정했다. 그러나 하나의 질문에는 모르겠다는 말을 반복했다. 아니요, 그건 모릅니다. 정말로 모릅니다. 그들에게 아무리 물어도 해결되지 않는 물음이 있었다.
학살은 사막에서 이루어졌다. 한 번에 몇 명을 죽일지, 어느 간격으로 죽일지, 누구를 죽일지에 대한 명령은 상부에서 내려왔다. 그러나 어디서 죽일지에 대한 명령은 없었다. 일부는 수용소에서 사살한 후 자루에 담아 바다에 던지거나 산에 던졌다. 일부는 새벽녘에 도착한 명령서에 따라 산 채로 수용소에서 끌어냈다. 눈을 가리고 신체들을 밧줄로 칭칭 매어 트럭 뒤에 타게 했다. 사막으로. 모래 폭풍은 수시로 불어닥쳤다. 잠깐 서 있는 동안에도 발등을 소복하게 덮어버리는 바람. 언덕이 만들어지고 사라졌다. 해가 완전히 뜨기 전에 일을 해치워야 하니까. 그들은 새벽녘 차를 달려서 어느 오목한 곳에 도착한다. 이쯤이 좋겠어. 적당히 멀리 왔고 묻기에도 편하니까 말이야. 시체를 따로 처리할 필요도 없잖아. 세 명이 죽을 차례였다. 군인들이 차에서 세 명을 내려 무릎 꿇렸고 그들은 벌벌 떨면서 땀을 비 오듯이 흘렸다. 발자국을 세며 거리를 벌린 군인들이 소총에 총알을 장전했다. 장교는 옆에 서서 외친다. 발포. 난사하는 피도 비명도 금세 사라진다. 모래 속으로. 모래바람 속으로. 삽으로 그들의 시체 위에 모래를 덮어 사라지게 한다. 그 사막은 세계에서 가장 메마른 곳이다. 2,000만 년 동안 연안의 비그늘이 건조 상태를 만들어 왔다. 그렇게 사막에서 사람들이 건조되었다. 그들은 기록하지 않았다. 자신들이 같이 기록될까 봐.
군인들이 끌려왔다. 그들은 정말 몰랐다. 그들이 어디에서 사람을 죽였는지. 부대에서 나와 차를 타고 간 곳인 것만 알 뿐. 사막은 동서로 100㎞, 남북으로 1,600㎞이며 그들이 한 시간 동안 차로 닿을 수 있는 면적은 수백 ㎢일 것이다. 그러나 언제 누구를 어디서 죽였는지 알 수 없는 한 그런 가정 또한 의미가 없다. 사랑하는 남편, 아버지, 아들의 시체가 묻혀 있을 가능성이 있는 땅 105,000㎢. 그게 그 여인들에게 주어진 땅이었다.
그래서 여인들은 수십 년간 사막을 헤매고 있다. 수천 명의 정치범을 암살하고 시신을 매장한 독재자 때문에. 누군가 어떤 뼈의 조각을 찾으면 그들은 굳은 얼굴로 뼈의 감식을 받고 결과를 기다린다. 뼈의 유전자가 누구의 것인지. 남편의 발을 발견하고 하루 종일 그 뼈 옆에 머물렀다는 여인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사바는 아무런 뼈도 찾지 못한 사람이었다. 뼈를 찾은 사람들이, 그저 지친 사람들이 하나둘씩 그만두는 시간에도 여전히 남아 뼈를 찾는 이. 사바는 자신의 애도를 지연하기로 했다. 남동생의 뼈를 찾는 순간에 모든 애도를 다 하기로. 다하지 못한 애도의 마음은 조금씩 사바의 마음에 쌓여있다. 모래처럼. 단지 그가 아직 완전히 죽지 못한 존재로 남은 것, 그것이 두려운 일이었다. 그가 끌려갔을 새벽부터 시작하여 사막이 완전히 달아오르기 전인 오전까지 탐색한다. 희망을 품는다. 여인들이 공유하는 지도에는 이미 수색을 마쳤다는 표시가 가득한데도, 다시 찾아봐야 했다. 왜냐하면 뼈가 나오지 않았으므로. 허리를 굽히고 땅을 보며 걷다가 하얀 덩어리가 보이면 짧은 삽으로 모래를 파낸다. 솔을 들어 거친 모래들을 조심스럽게 쓸어본다. 굳은 바윗덩어리를 들어본다. 손으로 흙을 부숴보고 만져본다. 뼈의 겉면은 매끈하고 안쪽은 다공질이다. 모래 알갱이를 걷고 걷어도 그 조각 하나가 나오지 않는다. 해가 높아지면서 땀이 흐르고 사바는 허리를 일으켜 수통으로 목을 적신다. 그리고 다시 허리 숙이기. 사바는 이 일을 계속할 작정이다.
“이상하게 볼 거예요. 왜 뼈가 필요하냐고.”
사바가 잠시 너를 바라본다.
“필요해요. 절실하게.”
해가 높게 뜬 정오에 여인들은 천막을 치고 그늘에서 쇠고기, 양파, 삶은 달걀 조각, 건포도, 올리브를 넣은 엠파나다를 나누어 먹는다. 다시 한번 105,000㎢의 사막을 쳐다보며. 애도의 마음은 모래 알갱이와 같은 것이다. 영원히 솟아나고 자리를 바꾸며 모든 것을 덮어 건조하고 수없이 분화되어 구분할 수 없는 것. 사바는 천막 아래에서 꾸벅꾸벅 낮잠에 빠져든다.
사바가 동굴을 빠져나오자, 그늘의 땅이 펼쳐졌다. 모래처럼 메마르지 않고 적당히 축축하고 부서지지 않는 편안한 흙이다. 생명을 품은 땅이다. 사바는 가장 높은 곳에서 망원경을 꺼내 든다. 별자리에서 별을 찾는 것처럼, 수없이 펼쳐진 비석을 세심하게 관찰한다. 애가 타도록 찾아 헤매던, 그러나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하나의 선명한 비석을 찾아.
3
다음 날 아침, 무아는 문을 열고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너는 잠에서 깨어나고 무력함에 부르르 몸을 떤다. 무아는 소매에서 꺼낸 흑연으로 검은색 벽에 검은색 선을 하나 긋는다. 그는 처음 만났을 때와 똑같은 말을 되풀이한다. 그럼에도 무언가 변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여기서 묵도록 해. 이곳의 규칙은 사람들에게서 멀리 떨어진 사막으로, 그리고 세상의 소음과 심지어 이곳의 소음도 없는 곳으로 물러나는 거야. 스스로 이방인이 되어야 해. 봉쇄는 곧 여행이기도 하니까.”
너는 답한다.
”이 모든 게 언제 끝나는 거야?”
무아가 말했다.
”어떤 것은 끝나지 않고 이어지지. 다음으로 이어지지.”
4
무아는 집에서 다음 사람을 기다린다. 너는 집에서 나와 세 갈래 길 중 하나로 걸음을 옮긴다. 약속에 이르는 길은 건조하고 메마르다. 하룻밤 꿈으로 목격한 폭력들을 떠올린다. 기억은 너의 의지와 상관없이 닥쳐오고 한번 도달한 기억은 너를 사로잡는다. 기억은 결코 과거일 수만은 없다는 걸 깨닫는다. 어떤 이는 살기 위해 잊고, 어떤 이는 살기 위해 기억한다. 다시 이어져 나타나는 비석의 바다. 너는 그들 하나하나를 눈여겨보다가 어느 비석 앞에 엎드린다. 비석은 네가 찾아 헤매던 것인가. 아니면 꿈에 등장했던 것인가. 이제 너는 차가운 비석에 이마를 대고 양손으로 비석의 옆구리를 붙잡는다. 그늘의 땅의 규칙을 다시 되짚어 본다.
‘애도하는 자’들은 사랑하는 혹은 사랑했던 사람의 비석 그늘에 앉아 몸을 굽혀 울고 있다. 그들은 날 때부터 애도하는 자였고, 이제 남은 날을 모두 애도하게 될 자이다. 오랜 시간 비석 앞에서 애도하는 자는 점점 검어져 그림자가 되어버린다.
너는 지금까지 자신을 집요하게 따라다니던 한 그림자를 돌아보게 되는 것이다. 너를 그대로 닮았지만 너는 아닌 그림자. 너를 애도하던 그림자는 누구였을까. 너의 어떤 부분이 정말 너였고 어떤 부분이 그림자였을까. 너는 기꺼이 사랑하는 이의 그림자가 될 수 있을까. 만약 네가 누군가의 그림자가 된다면 너의 그림자도 함께일까.
너는 이런 생각을 한다. 어쩌면 너는 수많은 애도하는 이들의 모음일 거라고. 오랫동안 퇴적되어 쌓인 애도의 집이라고. 너와 너의 그림자는 기꺼이 또 누군가의 그림자가 될 것이고 네가 사랑했던 사람은 너와 너의 그림자의 기억을 가지고 살아갈 것이다. 네가 사랑했던 사람은 이제 자기 자신과 너와 너의 그림자를 구분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한 명의 인간이 살아간다. 내가 그러하듯이. 너는 울기 시작한다. 언제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는 애도가 온몸을 뒤덮는다.
네가 내는 울음소리가 비석을 넘는다. 작은 돌도, 흔들리는 풀도, 산도 강도 그 울음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다. 소리는 다른 애도하는 자들의 울음소리와 뒤섞이고 여울로 굽이쳐 낮고 높음을 만든다. 무언가를 향한 마음이 진폭이 되어 세상을 흔든다. 흔들리는 사이 퍼지는 새금한 수액의 냄새. 죽은 나무들에서는 종종 그런 냄새가 났다. 산그늘이 비석을 뒤덮은 어느 끝에서 소리의 기세가 부러진다. 배음이 풀려나오고 울음소리가 점점 사그라진다. 소리가 멸하고 비석은 각자 그늘이 된다. 모든 것이 처음으로 돌아온 듯하다. 그러나 소리가 나지 않아도 마음은 끊기지 않으리라.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는지 알 수 없다. 다만 너의 몸은 검어져 있고, 너는 그림자가 되어 있다. 그림자는 비석이 만든 그늘 아래로 하나가 된다.
“그래, 이제 내가 술래야.”
5
너는 눈을 뜬다. 암석을 뚫어 만든 울퉁불퉁한 동굴이다. 스스로 쏟아낸 오물과 체액의 끈적한 감촉은 너의 선택과 상관없이 받아들여진다. 분명 무언가를 기억하려는 감각과 비슷하다. 누운 채로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리자 좁은 입구로 쏟아지는 가느다란 흰빛이 보인다. 어둠에서 빛을 바라보기. 너는 또 한번 몸을 일으켜 빛을 향해 동굴을 천천히 걸어 나간다.
소란, 아직인가…
- 이 글의 주요한 모티프는 2024년 5월부터 9월까지 <히스테리안 리서치클럽, 숨은 O>의 클럽원들과 함께 읽은 텍스트 / 나눈 대화에서 얻었다. 이 글은 나에게 긴 시간이라는 것, 타인이 겪은 상실과 애도, 그 체험이 가져다주는 감정, 그들이 가지고 있을 거라고 예상되는 그늘, 어떤 삶을 다시 들여다보기 위한 시도이다.
- 이 글의 제목과 세계관, 무아라는 인물은 게임 엘든 링의 DLC 콘텐츠 ‘황금 나무의 그림자’에서 따왔다. 게임이 가진 수행성, 죽음을 경험하지만 다시 깨어나 삶과 죽음을 반복하는 이미지를 빌리고자 했다. 침묵의 집과 규칙은 카르투시오 수도회의 수도원에서 얻었다. 불행과 슬픔에 대한 사유, 사랑하는 사람에게 불행이 닥칠 것을 생각하지 않고 사랑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은 클라라 뒤퐁-모노의 소설 『사라지지 않는다』를 참고했다.
- 숨은 신, 풍류, 한, 신명에 대해 알아가며, 그 모든 것이 이 땅 위에 수없이 중첩된 역사로 존재함을 느낄 수 있었다. 어떤 역사를 한 겹의 면이라고 생각해보자. 그 면들이 중첩되어 쌓이면서 두툼한 지층을 만든다. 지층은 땅을 파지 않는 이상 드러나지 않지만 면이 얇을수록 아래를 투명하게 비추고 뒤섞는다.
- 나라는 존재를 생각해 보면 다른 이에게 중첩된 기억이 나에게 상당 부분 침투해 있다. 그것이 나의 과반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무언가를 잃은 인물이, 나에게는 타인이, 더 중요한 존재일 수 있다. 끊어지지 않는 소리의 다발, 기의 소리침. 틈, 활동하는 무, 내내 떠들다 딱 끊어버리기.
- 선택지를 통해 등장하는 인물들은 실제 인물에게서 모티프를 얻었다. 첫 번째는 세월호 참사 희생자 권순범의 엄마 최지영, 두 번째는 양영희 감독의 다큐멘터리 「수프와 이데올로기」에 등장하는 감독의 어머니 강정희, 세 번째는 파트리시오 구스만 감독(Patricio Guzman)의 다큐멘터리 「빛을 향한 노스탤지어」에 등장하는 피노체트 정권하 실종자 가족을 참고했다. 이야기는 모두 모티프를 얻어 쓴 픽션이지만 그들과 분명히 연관되어 있다.
- 상실과 그 후의 어떤 일도 그들의 선택이 아니다. 나는 나의 욕망으로 다시금 이 이야기를 하는 건 아닐까 우려한다. 하지만 그들이 글과 말로 전했던 이야기를 다시 인용하는 것이 기억을 나눠 갖는 하나의 방법일 것이라 생각했다.
- 다만 이 서사가 거대하고 불균형한 사건과 폭력을 봉인하는 도구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이 이야기는 계속 되풀이되며 변형되는 어떤 것의 극히 일부일 뿐이다.
- 블라디미르 장켈레비치(Vladimir Jankélévitch)의 『죽음』. 미래 시제로 서술할 수밖에 없는 일인칭 죽음, 비시간성으로 경험되는 삼인칭 죽음과 달리 이인칭 죽음은 과거, 현재, 미래에서 전부 경험된다는 것. 죽음을 가까이에서 알 수 없는 것으로 경험한다는, 무력함의 특권. 일반성과 특수성 사이에서 죽음을 사유하기.
- 이 인물들을 주의 깊게 보게 된 공통의 기준이 있다. 한이 가진 속성—불가역적인 사건의 체험, 응고된 시간, 삭임을 경험한 인물이라 생각했고, 그들이 나에게 해답이 없는 문제에 관한 물음을 주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그들이 실제의 삶을 가진 인물이라는 것, 그것이 서사화되었다는 것, 서사는, 실제의 삶과는 상관없이, 늘 끝이라는 결말이 존재하고, 서사 밖에서도 여전히 그들의 삶이 존재한다는 생각이 있었다. 그렇다면 나는 깊은 순환의 자세로 나아가야 한다.
- 선택지의 문제. 어떤 인생에 어느 정도의 선택권이 있는지에 관해. 그것이 다른 이에게 주어졌을 때의 불편함. 어떤 거리 문제, 저만치의.
- 실제 있었던 일을 완벽히 재현하려는 서사적 욕망이 곧 사건과 폭력, 타자의 존재를 부인하게 만들 수 있다. 오히려 현실의 재현이 불가능함을 인정하고 허구를 펼칠 때 간혹 외부로 넘쳐흐르는 리얼리티가 발견되기도 한다. 허구는 흔적이다. 정확한 사건과 기억은 허구와 멀리 떨어져 있고 절대로 언어화되지 않은, 부인되고 잊히지 않아야 할 기억과 사람이 분명히 실재한다.
- 한은 한번 발생하고 나면 찌꺼기처럼 남는다. 길을 잃지 않고 우리의 공통성 일부를 확인하며 차근차근 그 찌꺼기를 들여다본다. 확인이 끝나는 시점에 받아들이고 또 갈라설 지점을 미리 생각해 본다.
- 서사는 우연을 기억하는 것이다. 기억한 것을 다시 기억하는 것이다. 다시 기억한 것을 다르게 기억하는 것이다. 다시 기억한 것이 기억의 의지와 함께 떠오르길 바라는 것이다.
- 애도하는 자가 살아가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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