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이 많은 너에게 ○ 임다운
- hysterianpublic
- 2024년 10월 28일
- 5분 분량
최종 수정일: 2024년 10월 30일
안녕.
나는 여수에서 태어났고 대학 때 서울에 와서 지금은 서울에 살고 있어. 고등학생 때 문수동에 있는 미술 학원에 다니면서 미대 입시를 준비했었어. 석고 소묘, 석고 정물 수채화를 하던 그때까지만 해도 ‘미술’이라는 것은 내가 어린 시절부터 알고 있던 ‘미술’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 같아. 그러다 (내 또래 미술인들이 대부분 그렇듯) 대학에 간 후로 느닷없이 ‘현대 미술’을 해야 했는데 그게 참 혼란스러웠어. 아직 그에 대한 이해도 없고 배운 것도 없는 것 같았는데 말이야. 고등학교 미술 교과서에 몬드리안이 나왔던 건 기억난다.ㅎㅎ 대학에 다니면서 줄곧 ‘세상에는 이런 미술도 있고 저런 미술도 있는 것 같은데 나는 어떤 미술을 해야 할까?’라는 고민을 했고 여러 가지 흉내도 내본 것 같아.
내가 20대 후반이었을 때 페미니즘 리부트가 있었어. 페미니즘을 접하면서 나는 그동안의 젠더 경험을 다시 되짚어보게 되었어. 그 시간은 내가 기존의 젠더 규범에서 탈출하고(야호~) 스스로를 재정체화할 수 있게 해주었어. 이후 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정체성 탐구를 출발시킬 수 있었는데, 그건 바로 여수(또는 전라도)라는 세계에서 자라온 나, 야. 나는 이 두 가지에서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었어. 바로 이 사회의 ‘정상성’에서 어긋나는 지점이 있다는 것.
왜 어떤 영화나 어떤 사람들은 여성을 ‘저런’ 모습으로 대상화하는지, 왜 인터넷 기사에는 매일같이 전라도 비하 댓글이 달리는지, 넌 궁금하지 않아? 나는 그 이유를 알아내야, 그리고 내 입장을 말할 수 있어야 이 세상에서 괜히 위축되지 않고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어. 흠. ‘여성인 나’가 엄마와 관련된 것이라면 ‘여수인인 나’는 아빠와 관련된 것이려나? 아무튼 나는 내게 덧입혀진 역사를 뜯어보고 싶어서 내 출신지인 여수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했어.
여수는 어떤 곳일까? 여수 사람은 어떤 사람들일까? 이순신, 거북선, 바다, 섬, 돌산 갓김치, 엑스포, 여수 산단 등등 여러 가지가 생각나는데… 혹시 여순사건에 대해 들어본 적 있어? 나는 어쩌면 내 조부모가 청년이었을 때 발생했던 그 사건이 지금의 여수를 설명하는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을 것 같았어.
여순사건은, 1948년 10월 19일 여수에 있던 군인들이 제주 4·3 사건을 진압하러 가라는 명령을 거부하고 반란을 일으킨 사건이야. 한반도에서는 남한 단독선거가 진행된 후 이제 막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상황이었고, 제주도에서는 단독선거 무효화를 외치는 시민들의 극심한 유혈 투쟁이 발생하고 있었어. 당시 모든 전남 동부 지역에서 단독선거에 반대하는 봉기가 일어났었다는데, 죽포에서도 선거 당일 투표소를 습격하고 방화하는 사건이 있었다고 해.
10월 19일 제주도 출항 명령을 거부했던 그 군인들의 강령은,
1. 동족상잔 결사반대
2. 미군 즉시 철퇴
였어. 이들은 여수를 점거하고 전남 동부 지역(순천, 광양, 구례, 보성, 고흥 등)으로 세력을 확장해 나갔지만, 미군의 지원을 받은 정부군에 의해 일주일여 만에 진압되었어. 그리고 진압 과정에서 대규모 민간인 학살이 벌어졌는데 여수에서만 약 5천 명의 피해자가 발생했다고 해. 정부는 처음에 이걸 ‘전남반란사건’으로도 불렀대.
이승만 정부는 이 사건을 계기로 ‘반공’을 국시로 내걸고 「국가보안법」을 제정했어. 그러니까 지금의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는 과정에는 제주 4·3 사건과 여순사건이 있었던 거야. 1980년, 정부가 5·18 광주 민주화운동을 탄압했던 근거도 바로 「국가보안법」이었어.
나는 내가 여수에서 성장하는 동안 주변에서 여순사건에 관해 이야기하는 걸 들어본 적이 없었어. 교과서에 잠깐 등장한 것 이외에는 말이야. 상상해보려고 해도 당시 도시 분위기도, 사람들 감정도 잘 와닿지 않고 요즘 여수의 이미지와는 아주 동떨어진 느낌이 들어. 근데 또 선거 때마다 전라도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민주당을 찍잖아. 이런 모습을 볼 때면 다른 사람들이 정책을 말하고 미래를 말할 때 마치 이들은 계속 과거를 말하고 있는 것 같아.
그리고 또 이런 생각이 들었어. 2021년, 「여수·순천 10·19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었잖아. 사건이 발생한 지 73년 만에 국가는 ‘반란’으로 보던 이 사건을 이제 ‘국가 폭력 희생’의 관점으로 보겠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나는 내 가족과 여수 사람들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이곳에서 태어난 나는 무엇일까? 상처를 가진 도시는 시간이 흐르면 어떤 곳이 되어야 할까? 왜, ‘한(恨)’이라는 말 있잖아. 여순사건이 남긴 상처를 한이라고 한다면, 그 한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
…
얼마 전 광주에 다녀올 기회가 있었는데, 거기서 5·18 때 조선대 학생이었던 아버지를 둔 광주 사람을 만났어. 그분도 나처럼 30대 여성이었어. 광주트라우마센터에서 자원활동가로 일한 적이 있는데 그때 여순사건 추모 행사에도 가보셨대. 그분의 추천으로 다음 날 전일빌딩에 갔어. 전일빌딩에는 5·18 관련 가짜 뉴스에 대해 조목조목 반박하는 증거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었어. 그곳에는 자녀들을 데려온 (내 또래로 보이는) 광주 시민도 있었고, “미국은 왜 우리를 안 도와줬어?”라고 질문하는 아이도 있었어. 그리고 광주와 5·18을 세계 민주화 운동의 모범으로 소개하시는 도슨트 할머니도.
전시를 보고 옥상 전망대에 갔어. 매일 오후 5시 18분에 ‘임을 위한 행진곡’이 재생된다는 시계탑도 보이고… 광장에 있는 누군가의 사투리도 들리고… 공사 중인 옛 전남도청. 그 뒤에 국립아시아문화전당(ACC)…. ACC는 지하 건축으로 설계되어 도심 위 수평의 풍경을 만들고 있었어. ‘범아시아 동반성장’이라는 모토로 운영되는 곳, 그곳에서는 베트남 전쟁과 반전 저항 가요를 소개하는 상설 전시가 열리고 있었어.
나는 ‘한은 다른 한을 풀어주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 이러한 ‘연결’의 태도는 나의 한을 드러낼 용기가 되어줄 것이고, 한을 개인적 욕망이나 지역주의에 갇히지 않게 해줄 것이고, 안전하게 역사에 접근할 수 있게 하면서, 다가오는 시대에 다시 기대를 갖게 하고… 그렇게 한이 가진 에너지는 다시 공동을 위한 미래로 나아가게 하는 동력으로 전환될 수 있다, 는 생각.
그렇다면 ‘연결’의 태도로 다시 돌아와서, 여수는 어떤 곳이 되어야 할까? 앞으로 이 도시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우리가 계획해본다면?
…
너는 여수를 어떤 도시로 인식하고 있을까. 지난 10년 동안 여수는 정말 많이 변했는데 지금의 여수에서 살고 있는 너와 20년 전 여수에서 살았던 나의 경험은 얼마나 차이가 클지, 그런 생각을 하면 정말 신기해. 아마 네가 생각이 많은 이유는 내가 한 이야기들과 별 상관이 없겠지. 하지만 살아가면서 개인의 능력과 노력으로 벽을 뚫고 꿈에 닿는 건 너무 어려우니까 너에게도 나에게도 이런 이야기를 나누는 건 도움이 될 것 같아.
우리가 살던 여수에서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반복되고 있을
너와 나의 청소년기를 위로하며,
다운이가.
제작 노트
최근 나는 사회 현상과 예술 작품에서 나타나는 한(恨)의 이미지를 나열해 보고 각각이 가진 특징과 그들 간의 유사성 및 차이를 살펴보았다. 한의 원인은 무엇인지, 한을 지닌 사람은 어떤 존재로 변모했고 어떤 사건을 야기했는지, 한 이전의 감정은 어떤 것이었으며 그 감정은 결국 어디로 갔는지. 이러한 질문을 통해 나는 상처를 지닌 도시를 이해하고 싶었다.
여순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사건을 촉발한 국방경비대 제14연대 군인들을 어떻게 판단할 것인지에 대한 질문에 봉착하게 되었다. 이것은 반란과 항쟁 중 어떤 명칭을 부여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기도 했다. 수천 명의 민간인 학살을 자행한 정부군을 가해자의 자리에 위치시킬 때 제14연대 군인들은 어느 자리에 위치해야 하는지, 현재 대한민국에서 살아가고 있는 나는 누구를 애도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여순사건 특별법을 통해 국가가 그 하위 주체인 도시에게 피해자의 위치를 부여해 주는 형국은 여전히 이 관계를 정리하기에 석연치 않은 느낌이었다.
지역 답사와 리서치를 통해 도시와 한을 탐구하면서 나는 한을 다른 한과 연결하는 방향을 생각해 보게 되었다. 개인 안에 정체되어 있던 한을 바깥으로 흘러가게 함으로써 한을 가진 주체는 피해 서사에 매몰되지 않고 상호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이는 한 맺힌 인간이 귀신 혹은 나비●1)가 되거나 '억척어멈'●2)이 되는 것처럼 초월적이거나 비합리적인 모습으로 변형되는 것과는 달리 자신을 직시하고 공동의 면역력을 키우는 방식이다. 이러한 방식을 통해 우리는 비로소 제14연대 군인들 그리고 여수 시민의 한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시작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현대사의 질곡, 여순사건’을 겪은 여수가 국가 정치의 객체 위치에서 나아가 통합된 하나의 주체로서 도시 정체성을 구축해 나갈 수 있을 것이라 조심스레 기대해 본다.
이 글의 제목에서 '생각이 많은'이란 표현은 청소년의 힘듦에 대해 흔히들 "넌 너무 심각해.”라거나 "너무 생각이 많아."라고 말하는 것에서 따왔다. 편지는 청소년 시절 내가 가장 능동적으로 생산했던 미디어이자 자연스러운 글쓰기 방식이다. 이 형식을 빌려 나는 ‘생각이 많던’ 과거의 나 그리고 현재의 여수 청소년과 연결되고자 하였다. ●
미주
1) 한국 구비문학인 아랑 설화에 따르면 억울하게 죽은 아랑은 원귀와 나비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2)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의 희곡『Mutter Courage und ihre Kinder』은 유럽의 30년 전쟁을 배경으로 군인들을 따라다니면서 물건을 파는 여성과 그녀의 자식들의 일대기를 담고 있다. 국내에는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로 번역되어 소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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