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내가 겪은 일, 내 눈앞에 상황을 이야기하는 일. 사람들이 그걸 들어주고 믿어주고 이해하고 공감하는 일은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요?
이 글은 ‘히스테리안 리서치클럽’이라는 시간과 공간을 통과하며 탐구하고 발견한 것들입니다. 경험했던 과정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경험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살핍니다.
목차
0. 한국적인, 한의 정서
1. 믿음 공동체, 인류
2. 통용하는 믿음을 만드는 절차, 의례
3. 믿음이 현실화되는 경로, 대화와 이야기
4. 생동하는 심상, 한
5. 의례를 통과한 이후의 시간
6. 묻고 나누고 싶은 질문들
이해를 돕는 글·그림
아래 그림을 핸드폰 카메라로 촬영하면 노란색 버튼(링크)이 생깁니다. 노란색 버튼을 누르면 자료를 확인할 수 있는 웹사이트로 이동합니다. 사이트 링크 https://brunch.co.kr/@parangwave/62
0. 한국적인, 한의 정서
질문이라는 녀석들은 고약한 지점이 있습니다. 한 번 신경 쓰이기 시작하면 온 사방에서 모양을 바꿔서 등장합니다. 안 보이는 척해 보지만, 뒤숭숭한 것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한국적인 것은 무엇일까요?
저를 따라다니는 질문 중 하나는 이것입니다. 한국적인 것은 무엇일까요? 여기서 한국은 어디일까요? 언제까지를 말하는 걸까요? 어릴 적 교과서에서 만난 ‘한의 정서'가 왜 이제 와서 알고 싶은 걸까요? 모르고 살아도 살아지는 일상에서, 이런 질문을 떠올릴 필요는 없을 텐데요. 그럼에도 질문은 유령처럼 따라와서 제대로 설명하라고 요구합니다.
한국 미술사 수업에서는 유명한 미술사학자의 책을 읽습니다. 긴 문장으로 한국미를 향한 예찬이 왼쪽 귀에서 오른쪽 귀로 곧장 통과합니다. 어떤 묘사는 너무 한국의 독창성을 외치는 것만 같아서 마음이 팍 식어버립니다. 아직 나는 뭔지도 모르겠는데, 혼자서 신명 나서 저 멀리 나아간 문장을 만나고 나면 허탈합니다. 뇌나 심장에 감흥이 생기지 않습니다. 소외당한 기분입니다. 나는 분명 여기 한국에 사는데 나를 둘러싼 곳에서는 찬사는커녕 제대로 탐구할 한국적 대상을 찾을 수 없습니다.
‘숨은○’에 대한 탐구
‘히스테리안 리서치클럽’이 건넨 질문. ‘숨은○’에 대한 탐구는 저에게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분명 혼자서 설친 시간도 있었습니다. 그 시간을 통과한 후에도 계속 그 질문은 남의 이야기였습니다. 저를 감응시키고 설득하고 믿어지게 만드는 이야기가 찾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무엇을 얻을지 모를 5개월간의 여정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참여했던 것 같네요.
1. 믿음 공동체, 인류
허구라는 생존 전략
인간이 무리를 이루고 살 수 있는 자연적 규모는 약 150명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인류는 150명의 한계를 훌쩍 넘어서 지구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한 종의 생물이 이렇게나 번성한 것은 이례적인 일입니다. 그렇다면, 인류는 어떻게 한계를 넘어 세계를 집어삼킬 수 있었을까요? 유발 하라리가 쓴『사피엔스』(김영사, 2023)에서는 그 이유를 인간이 ‘허구를 믿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인류는 언어를 통해 없는 일 조차도 있는 것처럼 믿을 수 있고 이를 토대로 거대한 집단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현대 국가, 중세 교회, 고대 도시, 원시 부족은 대규모 인류의 협력을 필요로 합니다. 그리고 성공적 협력은 ‘공통의 신화’를 통해 가능했습니다.●1)
죽음 이후의 세계관을 공유한다면…
책 속의 문장처럼 ‘대규모 인류의 협력’에는 ‘공통의 신화’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한국이라는 것 역시 일종의 믿음에 가까운 것은 아닐까 합니다. 우리가 한국을 믿는다면… 한국은 무엇을 어떻게 믿고 어떻게 현실을 만들었을까요? 자꾸만 질문과 답변이 빙글빙글 돌아서, 허락된 이 지면에서는 이렇게 적어내고 싶습니다. 한국은 한반도라는 공간에서 여러 시간을 함께 통과한 사람들이 믿고 있는 삶의 체계라고요. 사람들이 믿고 있는 삶의 체계는 장례식에서 극적으로 보입니다. 고인의 애도를 위해 모인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관과 삶에 대한 믿음을 토대로 고인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대화 나눕니다.
호상을 믿나요?
한국에는 죽음과 함께 짝지어 들리는 묘한 단어가 있습니다. 호상입니다. 호상(好喪)은 “복을 누리고 오래 산 사람의 상사(喪事)”●2)을 뜻합니다. 사전의 정의에 따르면 호상은 고인의 생애에 대한 이야기 짓는 일과 죽음을 애도하는 절차를 포함합니다. 반면 호상에는 죽음의 이유나 장면이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고인의 빈자리를 달래기 위한 이야기와 절차가 필요해서 였을까요? 그런 점에서 지금 우리가 믿는 ‘한국’이라는 ‘삶의 체계’는 죽음으로부터 역순으로 세워진 것은 아닐까 합니다.
남아 있는 자를 위해 만들어지는 이야기
살아가는 동안 한국이 개인의 삶에 어떻게 자리 잡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또렷하게 답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그 생애가 저무는 시점, 장례라는 의례를 통해서 한국이라는 삶의 체계가 작동합니다. 정작 고인이 어떤 믿음을 갖고 있는 것과 관계 없이 그를 애도하는 방식은 우리를 묶고 있는 한국이라는 삶의 체계,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이처럼 한국이라는 믿음은 삶 곳곳에 희미한 파편으로 남아서 현실에 영향력을 미칩니다.
2. 통용하는 믿음을 만드는 절차, 의례
의례를 통해 공유하는, 약속하는 믿음
믿음은 사람들과 함께 나눌 때 현실에 자리 잡을 수 있습니다. ‘의례적 행위'를 통해 개인과 사회는 ‘허구’를, 약속으로 실재하는 ‘믿음’을 공유받습니다. 케이틀린 오코넬의『코끼리도 장례식장에 간다』(현대지성, 2023)에서는 의례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는 의례에 참여함으로써 복잡한 사회 속에서 협력 관계를 맺는다. 의례가 간단하든 복잡하든 참여자는 몸과 마음에 변화를 느낄 수 있다. 우리는 서로 연결하고 두터운 유대를 느끼고, 새로운 질서에 몸을 맡긴 채 공동체에 뿌리내린다. 모든 사회적 동물 집단은 접착제를 바른 듯 하나로 묶인다."●3)
의례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서로의 상황을 공유하고, 함께 의례를 설정합니다. 의례는 통제할 수 없는 결과 앞에서도 과정을 점유하고 의미를 만드는 적극적인 행위입니다. 사람들은 의례 경험의 전후를 나누면서 믿음을 변화시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공유한 믿음에 따라 혼란스러운 현실을 판단하며 살아갑니다.
사회적으로 개인의 자리를 확인받는 의례
전 세계에 인류가 보편적으로 지속해 온 의례들이 있습니다. 관혼상제와 같은 통과의례는 한 사람의 생애를 분절하는 마디를 만들고 개인의 변화를 사회로 알리는 자리입니다. 개인에게 의례는 삶의 의미를 부여하는 체험적인 경험입니다. 사회는 의례를 통과한 사람에게 어른 대우, 신랑/신부의 대우, 죽은 이의 대우를 해주면서 상호작용을 합니다. 의례를 통해 개인은 사회라는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자리를 확인받습니다.●4)
예술은 의례가 될 수 있을까요?
함께 경험한 것을 나누고 의미를 만든다는 점에서 의례와 예술은 유사한 구석이 있습니다. 예술은 종교 없는 현대인에게 새로운 형태의 의례적 경험을 제공합니다. 예술은 사람들이 가진 감정과 신념의 표현, 상징의 재구성, 일상 속의 공동체적 결속, 개인의 치유와 성장을 지원하는 대안적 의례로 작용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3. 믿음이 현실화되는 경로, 대화와 이야기
통용되는 믿음으로 설득할 수 없는 삶
‘믿음’은 상호작용과 소통을 통해 살아 숨 쉬며 작동합니다. 그런데 집단에서 통용되는 생존 전략인 ‘믿음’이 나에게 맞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많은 경우 그런 상황과 불편함을 모르는 체합니다. 믿음 밖의 존재가 되는 건 생존에 불리한, 무서운 일이니까요. 동시에 통용된 믿음 밖으로 나가려는 충동을 느끼게 됩니다. 처음에는 불평불만이 쌓이고, 한계를 지나면 말과 행동으로 삐져나옵니다. 용기 있는 사람들은 본래 가지고 있는 믿음이 무효하다면, 새로운 믿음을 찾습니다. 새로운 믿음의 공동체를 찾아갑니다.
실패한 재현, 실재한 약속
동일한 현실과 공유받은 믿음으로 자신의 삶을 해석하지 못하는 사람은 답답함을 느끼고 자신을 겨우겨우 설명할 수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내가 겪은 일을 누군가에게 온전히 전달하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그렇다면, 나의 경험을 아무에게도, 누구에게도 공유할 수 없는 것일까요? 또한 다른 믿음의 체계를 가진 사람과는 진실된 대화를 할 수 없는 것일까요?
『망고와 수류탄』(두번째테제, 2021)은 도널드 데이빗슨의 ‘관용의 원칙’을 통해 대화의 가능성을 찾습니다. 관용의 원칙은 ‘번역의 실패’를 두 가지로 나누어 적용합니다. 첫 번째 의미의 실패는, 지나간 사건을 전면적으로 언어화할 수 없다고 전제합니다.
반면, 두 번째 의미의 실패에서는 상대방과 대화를 하면서 대화 내용 중에 전혀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을 때 ‘참이지만 번역 불가능한 언어’의 일부 영역을 함께 확인할 수 있습니다. 후자의 접근을 통해 우리는 대화를 나누고 있는 상대방이 대략적으로 올바르고 합리적이라는 전제를 유지합니다.●5) 또한 이를 통해 복수의 믿음이 하나의 현실 안에 존재할 수 있게 됩니다.
나와 마주한 이의 설명을 실재에 대한 부가사항 정도로 대하거나 전혀 믿을 수 없는 것이라고 대하면, 우리는 실재에 대해 이야기할 방법 모두와 단절되어 버립니다.●6) 경험을 한 당사자가 말을 믿지 않는다면, 현장에 없던 우리가 어떻게 과거를 설명할 수 있을까요?
‘하나의 현실’은 ‘여러 이야기’로 태어납니다.
그렇다면 같은 경험을 겪어온 사람들이 말하는 다른 묘사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심지어는 한 사람이 자신의 경험을 자꾸 다르게 이야기한다면요? 그건 각각의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다르게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살아가면서 내가 겪었던 순간을 반복해서 설명합니다.
이 설명의 방식은 언제, 누구에게 설명하는가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하지만 내가 진술한 과거는 모두 진실이기도 합니다. 그 방식과 내용이 변화했다면 이야기하는 ‘나’가 믿는 것, 세상이 실재하는 방식이 변했기 때문이죠.
‘삶의 의미’는 살아가기 위해서 만드는 믿음
삶에는 애초에 의미가 없습니다. 삶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이 사회를 살아가는 개개인이 각자의 삶을 어떻게든 이해하고 살아가겠다는 의지에 가깝습니다.●7)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반복적으로 설명하면서 무질서와 혼란 속에서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서서히 의미가 확정합니다.●8) 그래서 현실은 하나뿐이고 이미 지나갔지만, 현실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방식은 갱신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하나의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사회 속에서 불화하지 않고 살아내기 위해서 수많은 어긋남을 끝없는 개입과 중재로 다시 봉합할 수 있다고 답합니다.●9)
4. 생동하는 심상, 한
‘한’에 대한 질문을 해본 적 있나요?
‘히스테리안 리서치클럽’은 공유된 상황, 의도적 목표 그리고 일정한 절차를 통과해 왔습니다. 저는 이를 대안적 의례로 보고 있습니다. 함께 대화를 나누며 탐색했기에 지금까지 떠올려 보지 못한 심상을 많이 갖게 되었습니다. ‘한’에 대한 믿음이 없어도 생겨난 것이 있을 시간이었고 ‘우리’라고 부를 경험을 지나왔습니다.
연구 과정 안에서 태어난 질문들
나에게도 한이 있을까?
한은 왜 맺히고 푼다고 할까?
한은 어떻게 생겼을까?
한은 어떤 소리를 낼까?
한은 무슨 색일까?
한은 누가 가진 걸까?
한은 여성만 가진 걸까?
남성, 어린이, 외국인의 한도 가능할까?
한은 어떤 구성요소로 이루어졌을까?
한과 씻김은 어떤 관계일까?
한과 히스테릭은 무슨 관계일까?
한과 애도는 무슨 관계일까?
유교, 불교, 도교 안에서 한은 어떻게 해석될까?
화병은 정말 한국인의 병일까?
한은 정말 한국의 것일까?
왜 자꾸 한을 기억하고 꺼내는 걸까?
한은 유전이나 전승이 될까?
여러 개의 질문을 적었지만, 빠뜨린 질문은 더 많습니다. 떠오르는 질문이 있나요?
그 질문들을 거듭 떠올리며 클럽원들의 연구물을 살펴보면 좋겠네요.
5. 의례를 통과한 이후의 시간
의례를 통과한 이후의 시간은 믿음의 구현과 실천이 이루어집니다. 의례는 특정한 목적과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그것이 끝난 후에도 그 영향력은 지속됩니다. 의례를 통해 형성된 신념과 가치관은 일상생활 속에서 재구성되고, 개인과 공동체의 행동에 반영됩니다. 공동체는 의례를 통해 배운 믿음을 바탕으로 새로운 사회적 규범과 관계를 형성하며, 실천을 통해 공동체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강화합니다. 의례는 단지 한순간의 행동이 아니라, 지속적인 변화와 적응의 과정으로 이어집니다.
想像象(생각 상, 모양 상, 코끼리 상)
맹인모상盲人摸象, 직역하면 ‘맹인이 코끼리를 만진다' 입니다. 불교 경전의 하나인 『열반경涅槃經』의 우화에서 비롯했습니다. ‘일부분을 알면서도 전체를 아는 것처럼 여기는 어리석음을 이르는 말’을 뜻합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들을 각각의 몸으로 더듬어가며 말을 했습니다. 우리가 더듬어낸 것이 코끼리인지, 코뿔소인지 그것도 아니면 서로 같은 것을 살핀 것이 맞는지도 확언할 수 없습니다. 대신 제가 통과한 ‘숨은○’에서 단언할 수 있는 것은 나의 말을 듣는 존재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혼자서는 할 수 없을 생각을 밀어내며 더 넓은 것을 탐색하고 교환하는 과정이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배우고 익혔고 결론지었을까요?
그렇다면 2024년 5월부터 9월까지, 10여 회를 넘게 만나서 긴긴 대화를 나눈 우리는 무엇을 남겼을까요? 과정 중에 떠올린 질문들의 답을 완결했을까요? 이야기의 완결은 가능한 일일까요? 이야기의 끝에서 무엇을 믿게 되었을까요?
우리는 필연적 실패에도 대화를 이어갑니다. 대신해서 우리는 우리가 되는 과정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사실을 배웁니다. 과거를 다시 불러와 함께 의미 지을 수 있는 과정을 만들 수 있다는 믿음을 만듭니다. 함께 의미를 탐색할 수 있다는 믿음의 공동체를 얻습니다.
6. 묻고 나누고 싶은 지점들
클럽원들의 연구물을 살펴볼 때 참고할 질문
연구물에 등장한 인물은 한, 죽음, 애도와 어떤 상황과 조건에서 만나게 되었나요?
연구물의 등장한 한, 죽음, 애도는 어떻게 표현되어 있나요? 무엇으로 구성되었나요?
오늘 가장 믿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이었나요? 어떤 부분에서 나에게 와닿았나요?
이야기는 사방 도처에 널려있지만, 나에게 닿는 진실한 이야기는 몸으로 부딪치고 관계하는 이들로부터 탄생합니다. 자주 실패라고 느껴지지만 결국 나로부터 시작한 사건을 만들 때, 믿을 수 있는 이야기를 찾게 됩니다. 대화와 의례가 반복되면서 서로에 대한 이해를 넓히는 방식으로 비집고 들어갑니다. 의례는 여전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 현장을 살펴보러 온 당신 역시 질문에 휘말렸습니다. 앞으로 오늘의 질문이 자꾸만 따라다닐 겁니다. 풀리지 않는다면, 다시 궁금함이 차오르기 전에 또 함께 이야기 나눌 수 있으면 좋겠네요. ●
미주
1) 유발 하라리, 조현욱 옮김, 『사피엔스』, 김영사, 2023 참고.
2) 표준국어대사전 ‘호상’
3) 케이틀린 오코넬, 이선주 옮김, 『코끼리도 장례식장에 간다』, 현대지성, 2023, 29-30쪽.
4) 김현경, 『사람, 장소, 환대』, 문학과지성사, 2015 참고.
5) 기시 마사히코, 정세경 옮김, 『망고와 수류탄』, 두번째 테제, 2021, 99-100쪽 참고.
6) 위의 책, 103쪽 참고.
7) 위의 책, 294쪽 참고.
8) 위의 책, 122쪽 참고.
9) 위의 책, 203쪽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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